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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울 종로구] 옛날집낙원아구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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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집낙원아구찜


- 옛날집낙원아구찜
02-741-3621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36

옛날집낙원아구찜은 낙원동 아귀찜 거리 터줏대감 집이다. 1층은 작고 아늑한 분위기이며 2층은 정갈한 한옥 분위기가 난다. 3층은 단체 회식에 어울린다.


※ 소개 정보
- 대표메뉴
아귀찜 / 해물찜

- 문의및안내
02-741-3621

- 쉬는날
명절연휴

- 신용카드가능정보
가능

- 어린이놀이방여부
0

- 영업시간
11:30 ~ 22:00

- 예약안내
전화 예약 문의 (02-741-3621)

- 취급메뉴
아귀찜 / 해물찜 / 아귀탕 / 해물탕 외

- 포장가능
가능(일부 메뉴)







원조 옛날집 낙원아구찜 내부01원조 옛날집 낙원아구찜 내부02원조 옛날집 낙원아구찜 내부03



◎ 주위 관광 정보

⊙ 나화랑


- 홈페이지
나화랑 http://www.na-gallery.com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1

나화랑은 1987년을 시작으로, 그 동안 폭 넓고 깊이 있는 미술감상의 기회를 제공해 왔다. 또한 신진작가 육성 프로그램과 전시기획안 공모를 통하여 젊고 재능있는 작가들의 창작의지를 고취하여 계속해서 작품을 해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이러한 작가들 중심으로 해외 아트페어를 준비하고 있다. 회화, 사진, 판화, 조각, 미디어영상 등 모든 장르를 다루면서 앞으로 더욱더 우리나라의 미술문화를 활성화하고 풍요롭게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 갤러리 미즈


- 홈페이지
http://www.mizgallery.com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1

1982년도에 개관한 갤러리 미즈는 기획전, 초대전을 비롯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 견인차 역할을 해오고 있다. 특히, 작가 발굴을 위한 일련의 MIZ Artists 프로그램은 젊은작가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그동안 이 제도를 통해 작가 김지현 등 20여 명이 배출되어 한국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 일본공보문화원


- 홈페이지
http://www.kr.emb-japan.go.jp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4 (운니동)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은 1971년 7월 30일 '주한일본대사관 공보관실'로 걸스카웃 빌딩에서 개소하였다. 1975년 2월 15일 현재의 건물인 국원빌딩 1층으로 이전한 후 몇 차례의 확장을 거쳐 현재의 규모에 이르렀다. 1988년 1월 1일부터는 '주한일본대사관 광보문화원'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93년 4월 1일 '광보'를 한국어에서 자주 사용하는 '공보'로 바꾸어 현재와 같은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지하 1층에 일본음악정보센터, 도서관과 로비, 2층은 전시실, 3층에는 일본음악정보센터와 유학, JET 상담실이 있다.


⊙ 다보성 갤러리


- 홈페이지
http://daboseong.com/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다보성 갤러리는 1983년에 문을 연 이래 수준 높은 다수의 고미술품과 귀중한 사료(史料)를 수집(蒐集)하여 국립 박물관을 비롯하여 시립, 공립, 각 대학 박물관, 사립박물관 등에 공급시키는 일에 힘 써왔다. 그 가운데는 하마터면 외국으로 흘러 나갈 뻔했던 최상급 문화재도 있었고, 일본 등지로 팔려가는 귀중한 북한 문화재들을 치열한 경쟁 끝에 국내로 들여오기도 하여, 나름대로 우리 문화유산 지킴이 역할을 하여 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골동(骨董)이라고 하면 무조건 가격이 높은 것, 서민들은 만져볼 수도 없는 특수 계층의 취향과 소유의 대상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관행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골동은 저가(低價)여도
좋고, 누구나 지니고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생활 속에서 손때묻은 작은 유물들이 더 정답게 느껴지고 더욱 값어치 있는 경우가 많다. 다보성고미술관은 이러한 소품(小品)들을 모아 매년 전시를 하여 왔다. 지필묵연(紙筆墨硯)의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비롯하여 개구리 모양의 작은 연적(硯滴), 예전에 여성들이 애완하였던 작은 화장품합(化粧品盒), 그리고 원앙의 모양을 조각한 향로뚜껑, 신라시대 토우(土偶)와 조선시대 백자인형들, 화조(花鳥)를 화사하게 수놓은 수병풍(屛風) 가래개 등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전시된다.


⊙ 독립선언문 배부 터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서울 종로구에 있는 운현궁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독립선언문 배부 터’라고 적힌 작은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검토하고 배부했던 위치다. 지금도 표지석 앞에 민족대표 33인과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의 이름을 기록한 돌이 자리해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한다. 3.1 독립선언문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보성인쇄소에서 찍어낸 후 신축 중이던 천도교 대교당 마당(현재의 배부 터 바로 옆)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종교계, 학생 대표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는 길옆에 자리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1919년 봄의 자긍심을 느끼고 되돌아볼 수 있는 특별하고도 소중한 장소라 하겠다.

⊙ 서울 운현궁


- 홈페이지
http://www.unhyeongung.or.kr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4

운현궁은 현재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사적의 문화유산이다. 운현궁은 경복궁과 같은 궁궐이 아니라 왕족의 친족들이 거주하던 곳을 궁(宮)으로 부른 것 중의 하나이다. 궁(宮)은 생활의 공간이며 궐(闕)은 정치의 공간으로서 경복궁이 정치와 궁중생활이 함께 이루어진 곳이었다면, 운현궁은 왕족의 친족인 흥선대원군의 일가가 거주하고 생활하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운현궁은 조선조 말기의 역사적 사건들 대부분이 시작된 곳이며 수많은 개혁정책과 쇄국정책이 시행된 곳이었기에 그 역사적 상징성은 남다르다고 하겠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였으며,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 즉 임금이 되기 전까지 출생, 성장한 곳이었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대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이 때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는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지고 흥선군의 사저는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운현궁의 신증축 공사는 고종이 즉위한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시작되었고, 9개월만에 노안당과 노락당의 준공을 보았다.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대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대, 구 TBC방속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전해진다.

운현궁의 대표적인 건물은 고종 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안당과 노락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때 주로 이용되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유폐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말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 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이로당은 노락당 옆에 있는 안채로서 구조가 "口"자형으로 되어 있고 그 내부 가운데에 정원이 있는 철저한 금남의 구역이었다. 노락당 못지 않게 운현궁의 절대적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謹門), 공근문(恭勤門) 등이 있었으며,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터에 경근문의 기초만 남아있다.

운현궁의 규모와 구조가 이와 같이 웅장하고 화려했던 것은 대원군이 권좌에 있을 때 뿐이었다. 그가 하야한 후 고종 18년(1882), 청의 정부에 피납되어 있는 3년여 동안 운현궁의 재정은 매우 궁핍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운현궁의 위용도 퇴락해졌으며 대원군이 타계한 다음은 그 유지관리가 매우 어려워졌다.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1845~1912)이 관리할 때, 고종이 내탕금 270만냥과 쌀 370석을 하사하여 운현궁을 수리하고 밀렸던 빚을 갚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1991년 대원군의 5대손 이청(1936~)씨가 서울특별시에 양도 의사를 밝힘에 따라 서울특별시에서 매입하였고 1993년 11월부터 운현궁에 대한 보수 및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 천도교중앙대교당


- 홈페이지
종로구 문화관광 http://tour.jongno.go.kr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우리나라 천도교의 총본산이다. 천도교는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3대 교주 손병희는 1904년 이용구가 일진회와 합하여 친일 행위를 자행하자, 이와 구별하기 위해 천도교로 1905년 개칭하였다. 개칭한 이후, 1906년 1월 『천도교 대헌』을 반포하고 교단을 새롭게 조직하였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였으며, 3·1운동 당시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던 천도교는 광복 이후 북한 지역 교세의 급격한 증가에 힘입어 크게 확장되었다가 한국전쟁으로 다시 쇠퇴하였다. 1953년에 중앙 총부를 서울로 옮겼으며, 1961년에는 최시형과 손병희의 법설(法說)이 포함된 『천도교 경전』을 간행하였다. 중앙대 교당은 천도교의 종교 의식 및 각종 정치집회, 예술 공연 등의 일반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붉은 벽돌로 고풍스럽게 지어진 4층 건물이다. 제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건축하기로 결정하여 교인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일본인 중촌여자평(中村與資平)이 했으며,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시공하고, 일본인 기사 고곡호시(古谷虎市)가 총감독을 맡아 완공하였다. 기초부는 화강석으로 벽체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지붕 옆면이 사람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인데, 철근 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하였다. 또한, 앞면에 2층 사무실을 탑 모양의 바로크풍으로 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서울시내 3대 건물의 하나로 꼽혔으며, 교회당의 구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총 건평은 927.87m²(280.68평)으로 약 800명에서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다. 중앙대교당 옆으로는 현재 천도교의 사무실이 있는 수운회관이 있다.

⊙ 경운동민병옥가옥


- 홈페이지
http://www.cha.go.kr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0길 23-9 (경운동)

193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개량한옥으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건축가 박길용(1898∼1943)이 설계했다고 전한다. 경운동 66-8번지에 있던 정순주 가옥과 같은 평면으로 정순주 가옥은 이 집의 뒷채에 해당한다. 원래 건축주가 두 아들에게 한 채씩 주기 위하여 지은 집이라고 한다. 네모반듯한 집터 동쪽에 대문이 있고, 앞마당으로 들어가면 남향으로 H자형의 건물이 있다. 중심축에 부엌·대청·건넌방·사랑방이 있고, 부엌의 앞쪽으로 안방, 뒤쪽으로 뒷방이 있다. 반칸 너비의 툇마루를 두어 동선을 연결하였다. 사랑방의 앞쪽에는 누마루를, 뒷쪽에는 현관마루를 두었다. 건넌방은 상당히 큰 방으로 꾸며 사랑방 구실을 하고, 현관마루와 연결되는 사랑방은 응접실 용도로 사용하도록 설계한 듯하다. 마당 남쪽 담장 밑에는 작은 화단을 가꾸어 놓았다.현관과 화장실·목욕탕을 내부에 두고 이들을 연결하는 긴 복도를 둔 점과 유리창을 단 점 등은 이 시기 개량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며, 주택의 변천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 인영아트센터


- 홈페이지
인영아트센터http://inyoungart.co.kr/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0길 23-4 (경운동)

인영갤러리는 40여 년 간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소장품 전시로 2017년 9월에 인사동에서 개관하여, 동시대 작가들과 함께 교류하며 전시를 열고 있다.


⊙ 경인미술관


- 홈페이지
경인미술관 http://www.kyunginart.co.kr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0길 11-4 (관훈동)

1983년 12월 6일 개관한 경인미술관은 서울의 한가운데 종로구 관훈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예술인의 문화 공간으로서뿐 아니라 국내,외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총 약 500평(1650㎡)의 대지 위에 제 1, 2, 3, 5전시실과 아틀리에, 야외 전시장, 각종 행사를 할 수 있는 야외 무대와 스크린, 전통 찻집(다원)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문화 장소이자 미술인들의 전시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고 또 예술인들의 만남의 장소로서도 이름이 나 있는 곳이다.한편 야외무대를 비롯하여 정원들 사이 사이에 위치한 조각, 입체 및 설치 작품들로 인해 경인미술관은 어느 한 부분도 놓칠 수 없는 곳이다. 봄, 가을에는 야외 콘서트가 열리고 작가와 관객의 만남인 시연회가 이루어질 때도 있다. 미술관이란 어느 특정인의 장소가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소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경인미술관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 경인미술관의 역사지방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던 한옥전시실은 조선조 철종의 숙의범씨(淑儀范氏) 소생 영혜옹주(永惠翁主)의 부마이자 태극기를 만든사람으로 유명한 박영효(朴泳孝)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속칭 서울의 8대가 중 하나로 이름난 곳이었으나 현재는 남산골 한옥촌으로 미술관에서 기증·이전하여 보다 많은 시민들에게 조선시대 양반가의 건축양식을 둘러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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