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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충청남도 부여군] 구드래돌쌈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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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드래돌쌈밥


- 홈페이지
http://0418369259.modoo.at/

- 구드래돌쌈밥
041-836-9259

-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 31

백제의 고도 부여 구드래 관광단지 입구에 위치한 식당으로서 외형은 화려하지 않으나 토속적인 분위기에 안팎에서 반겨주는 각종 화초와 은은한 음악, 우리의 옛 물건을 활용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를 자랑한다.
특히 쌈밥에 올리는 야채는 농약으로부터 오염이 완전 배제된 무공해야채를 농장과 계약 재배하여 식단에 올리고 있으며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약용초를 위주로 한 20~30여 가지의 진귀한 야채와 식용꽃은 각종 성인병예방 및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강식으로 동식당에서 직접 개발한 쌈장과 곁들이면 그 맛이 일품이다.



※ 소개 정보
- 대표메뉴
돌쌈밥

- 개업일
1994년

- 문의및안내
041-836-9259

- 쉬는날
명절연휴 (전화로 문의)

- 신용카드가능정보
가능

- 어린이놀이방여부
0

- 영업시간
10:30 ~ 20:30

- 예약안내
전화 예약 가능 (041-836-9259)

- 주차시설
주차가능

- 취급메뉴
주물럭돌쌈밥 / 불고기돌쌈밥 / 돌쌈정식 / 오리돌쌈정식 외

- 포장가능
포장 불가능





◎ 화장실
남녀개별 / 업소 내부 위치





충남_부여_부여 여행이 더 즐거워지는 4가지 별미 15



◎ 주위 관광 정보

⊙ 구드래조각공원


- 홈페이지
http://tour.buyeo.go.kr/

-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 60 (부여읍)

부소산 서쪽 끝자락에 있는 구드래는 백마강과 어울려 빼어난 경승을 이루고 조각공원이 잘 꾸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휴식공간이다. 구드래 나루는 백제시대에 도성인 사비성을 출입하는 항구와도 같은 큰 나루였으며, 현재는 백마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의 선착장으로 주변에는 토속음식이나 별미를 즐길 수 있는 식당들이 많이 있다.1985년도에 국민관광단지로 조성된 구드래에는 옛 백제인의 조각 기술을 이어받은 지역 출신 유명 조각가 작품 30점과 1999년도 국제현대조각 심포지움에 참가한 국내·외 유명 조각가의 작품 29점 등 총 59점의 조각 작품으로 옛 정취와 함께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함께 갖춘 공원을 조성하여 관광객에게 상시 개방,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 곳은 부여 사람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며, "백마강과 물새가 울고, 일엽편주 돛단배를 홀로 저어가는 사공"으로 시작하여 널리 알려진 '백마강 달밤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백제시대 왕을 부를 때 지배족은 어라하(於羅瑕), 백성은 건길지라 하였다. 구드래는 '구ㄷ으래' 로 '구(大)'가 왕칭어인 어라하에 접두하고 두말사이에 지격촉음인 'ㄷ'이 끼어들어 '구ㄷ어라하' 가 되고 다시 줄어들어 '구ㄷ으래(구드래)'로 변천한 것으 로 볼 수 있다. 또한 '구드래'는 '大王'의 의미로 일본서기(서기 720년 편찬)에 백제를 '구다라'로 부른 대목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 '구다라' 도 大王國이란 뜻으로 높여 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 도강영당


- 홈페이지
http://tour.buyeo.go.kr
http://www.cha.go.kr

-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15 (부여읍)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부여 유림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조선 말 부여현(扶餘縣)의 내아건물(內衙建物)로서 해방 후 귀속재산인 가옥(家屋)을 수리하였다. 1971년 국가의 보조를 받아 9평의 영당(影堂)을 신축하고 홍가신(洪可臣)·허목(許穆)·채제공(菜濟恭)의 위패를 모셨다.


⊙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 홈페이지
http://tour.buyeo.go.kr/
http://www.cha.go.kr

-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15

* 백제 문화의 보고, 부소산과 부소산성
부여에 들어서면 시가지 북쪽에 검푸른 숲을 이룬 해발 106m 의 나지막한 부소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다.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에는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낙화암, 백화정, 사자루, 반월루, 궁녀사, 고란사, 부소산성(사적), 해맞이하는 영일루, 성충ㆍ흥수ㆍ계백의 백제 충신을 모신 삼충사, 곡식 창고터였던 군창지, 백제 군인의 움집 수혈병영지 발길 닿는 곳마다 발걸음을 붙잡는 토성들, 백제의 역사와 백제왕실의 이야기가 곳곳에 배어 있다.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북동쪽의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산성을 동반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迎日樓), 반월루(半月樓), 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사방의 문지(門址),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 도성의 일환이며,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수도의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 보다 먼저 500년(동성왕22)경 이미 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대대적인 개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부의 성벽은 통일신라시기에 수축되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고을의 규모에 맞도록 축소되어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 문화를 만난다, 부소산의 유적지]
* 삼충사
부소산성 정문인 사비문을 지나 조금 걸어올라가면 삼충사가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사당에 들어서면 백제말 삼충신인 성충, 흥수,계백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제때 제향을 올리고 세분의 숭고한 구국충절을 기린다.
* 영일루
영일루는 부소산성의 맨 동쪽 산봉우리에 세워져 백제왕과 귀족들이 멀리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계획하고,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했던 영일대에 세운 누각이다.
* 군창지
일명 만리창(萬里倉)이라 불렀던 이곳은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된 군대 곡식을 보관했던 창고이다.
* 수혈병영지
군창지를 조금 지나면 움집이 보인다. 움집은 백제 때 군인들의 움막을 발굴,복원한 것으로 1m 가량 움을 파고, 사방을 나무나 짚으로 벽을 두른 뒤 초가지붕을 얹은 모습이다. 원래 움집터와 저장고를 발굴한 곳에 전시실을 지어 구조를 자세히 살필수 있게 하였다.
* 사자루부소산 가장 높은 곳(해발 106m)에 위치한 사자루는 동쪽 영일루와 더불어 일월 음양을 뜻하며 달이 밝은 밤 누각에 오르면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져지고 시흥이 절로 일어난다. 사자루 건립 당시 터를 파다가 광배 뒷면에 명문이 새겨진(정지원명)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이 발견되었다. 사자루 현판 글씨는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고,뒤쪽에 붙은 白馬長江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 작품이다.
* 백화정
낙화암 절벽위에 세워진 육각지붕의 정자가 백화정이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백화정은 백제멸망 당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숭고한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모임에서 세웠다.
* 궁녀사
반월루 광장에서 동북쪽 태자골로 조금 내려가면 궁녀사가 나온다. 이 궁녀사는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백제 여인들의 충절을 추모하고 그 뜻을 후세에 널리 기리고자,1965년에 세웠다. 10월 백제문화제 때 제향을 올리고 있다.
* 부여관북리백제유적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 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19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어 있다. 19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사비도성 가상체험관


- 홈페이지
https://blog.naver.com/sabiexperience

-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15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 유적지구 중 부여 지역의 문화재를 접할 수 있는 역사 문화체험 전시장이다. VR(가상현실)과 AR(증강현실), 홀로그램 등 다채로운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전시콘텐츠를 관람할 수 있다.

⊙ 부여하늘날기


- 홈페이지
https://smartstore.naver.com/skybanner/products/5016744631

-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성왕로173번길 12

부여 열기구 체험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열기구 자유 비행이 가능한 곳으로, 한국관광공사의 테마여행 10선에도 선정되었다. 부여는 산이 낮고 높은 건물이 없어 열기구 비행에 최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처럼 계류형 열기구에서 그치지 않고 마치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아볼 수 있다. 백마강 상공을 7~8km 비행하며 부여군내와 금강 줄기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낙화암, 궁남지 등 찬란한 역사의 백제 유적을 발아래 두고 바람을 타다 보면 절로 행복해진다. 맑은 날에는 강에 비친 열기구의 모습이 낭만적이다. 비행이 끝난 후에는 로맨틱한 세리머니를 즐기며 마무리까지 완벽한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

⊙ 낙화암


- 홈페이지
https://www.buyeo.go.kr/
http://www.cha.go.kr

-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성왕로 247-9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성왕이 국가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위덕왕ㆍ무왕ㆍ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제는 국운을 다했던지 의자왕도 정사를 소홀히 하고, 나라가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ㆍ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가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다. 이처럼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

⊙ 구드래나루터선착장


- 홈페이지
https://www.buyeo.go.kr

-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 72

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위치한 구드래나루터선착장에서는 황포돛배를 타고 백마강을 일주할 수 있는 곳이다. 황포돛배는 옛 돛배를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길이 19.8m, 폭 4.5m, 약 47명 정도의 인원이 승선 가능한 규모로 외형은 옛 모습 그대로를 복원하고 내부는 편의시설과 안전설비를 갖춰 안전도를 높였다. 또한 광목을 황토물에 삶아 색을 낸 넓은 돛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항포돛배는 3.5km 구간에 걸쳐 왕복 운항을 하며, 백마강을 거닐며 부산소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담고,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경험을 선사한다.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유네스코 세계유산]


- 홈페이지
부여문화관광 http://tour.buyeo.go.kr/
정림사지박물관 http://www.jeongnimsaji.or.kr/

-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 라는 글이 발견되었다. 태평팔년은 요(遼)의 연호(年號)이며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해당된다. 이 문자와의 발견수는 이곳에서 출토된 고려 기와 중에 가장 수량이 많았으며 고려 재건시의 정림사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이다. 가람배치형식(伽藍配置形式)을 보면 전형적인 일탑식배치(一塔式配置)로 남으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一直線上)에 세워졌으며 주위(周圍)를 회랑(廻廊)으로 구획(區劃)하였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 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이 남아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 국보로 유명한, 정림사지오층석탑 *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 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 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다.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 부여향교


- 홈페이지
http://tour.buyeo.go.kr/
http://www.cha.go.kr

-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의열로 21-4

조선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700년대에 구교리(舊校里)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872년에 수선재(首善齋)를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수선재·제관실(祭官室)·수복실(守僕室)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장전적은 판본 8종 8책과 사본 12종 13책이 있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 군창지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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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 4

부소산성 내의 동남부 가장 높은 위치에 해당되는 곳에 있는 이 군창지(軍倉址)는 1915년 이곳 지하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백제시대 군량(軍糧)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알려지게 되었다.백제 때 군수물자를 비축했던 곳으로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사적 5) 동쪽 정상부에 있다. 이곳은 영월대(迎月臺)라 하여 넓고 평평한 광장인데,1981년과 1982년 두 차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함으로써 건물터의 규모가 상세히 밝혀졌다.

건물의 배치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였는데 길이 약 70m, 넓이 약 7m, 땅속 깊이 약 47cm 정도이다. 지금도 이 일대를 파보면 불에 탄 곡식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사비성 함락과 함께 멸망할 때의 비극적 역사를 말해준다. 군창이 있던 곳은 지금도 더러 발굴되고 있는데, 이 군창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다.




본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에서 '23년'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국문 관광정보 서비스'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https://kto.visitkorea.or.kr/kor.kto'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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