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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상북도 경주시] 소사이어티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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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이어티나귀


- 홈페이지
https://www.instagram.com/toomuch_talker_donkey/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임해로 127

소사이어티나귀는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에 있다. 빨간 벽돌로 이루어진 외관과 모던한 분위기의 내부가 눈에 띈다. 피자와 파스타 맛집으로 유명해 늘 사람이 많다. 대표 메뉴는 얇은 도우에 치즈와 방울토마토, 그리고 요거트소스가 올라간 두더지피자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피자다. 이 밖에 공작파스타, 나귀크림파스타, 몰치킨커리, 감바스 알 아히요 등을 맛볼 수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인정한 안심식당이다. 경주 IC에서 가깝고, 인근에 황성공원, 첨성대, 동궁과 월지, 국립경주박물관이 있어 연계 관광하기 좋다.


※ 소개 정보
- 대표메뉴
두더지피자

- 문의및안내
010-8329-2280

- 쉬는날
연중무휴

- 신용카드가능정보
가능

- 어린이놀이방여부
0

- 영업시간
11:00~21:00 (브레이크 타임 15:00~17:00)

- 예약안내
가능 (전화로만 가능)

- 주차시설
가능

- 취급메뉴
두더지피자 / 공작파스타 / 나귀크림파스타 / 몰치킨 등

- 포장가능
가능





◎ 화장실
남녀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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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위 관광 정보

⊙ 분황사


- 홈페이지
http://www.bunhwangsa.org
경주문화관광 https://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芬皇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분황사는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으면서 국보로 지정된 모전석탑으로도 유명하다.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 간 사찰로 명성이 높다. 선덕여왕 3년(634년)에 지어진 절로서,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를 쓴 곳이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경덕왕 14년(755년)에 불상주조의 대가인 강고 내말이 만든 약사여래상이 있었다. 선덕여왕의 권유로 자장법사도 오래 머물렀으며, 원효의 아들인 설총은 원효대사가 돌아가신 후 아버님의 소상을 만들어 모셨고 이 소상은 고려후기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효가 이곳에서 해동종을 완성했다고 하여 해동종을 분황종이라고도 한다. 이 절은 평지 일탑 일금당의 가람배치로서 다른 사찰에서 보듯 중문, 탑,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나 절터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치는 않다. 통일신라 이전에 세운 모전탑으로 원형은 5층인지 7층인지 9층인지 알 수 없으나 그중에서 지금은 3층(국보)만 남아있다. 신라탑은 전탑양식이 유행하여 백제의 미륵사지 목탑구조 모방 전탑과 결합하여 통일신라 석탑의 정형을 이루었다. 통일신라의 모전탑 및 전탑은 안동, 의성, 제천 등지에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어갔다고 한다.

이 탑은 바다속의 안산암을 갈아서 쌓은 것으로 1915년 탑을 수리하다가 사리장치가 든 돌 상자 속에서는 구슬과 금은으로 된바늘, 고려시대 화폐가 발견됨으로써 고려시대에도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바늘은 탑을 건립한 선덕여왕과 관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에는 1층 탑신 4면에 감실을 만들고 돌문을 달았으며 이 입구마다 좌우로 수문장인 금강역사상이 있고, 탑에는 돌사자가 놓여 있다. 금강역사상은 조각이 아름답고 입체감이 두드러져 삼국시대 조각 기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분황사 사찰 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오르거나 흘러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분황사 경내, 당시의 우물 석정에는 아직도 물이 마르지 않고 있는데 이 우물 속에 호국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1965년 우물 속에서 14구의 목이 부러진 석불들이 출토되었고이 석불들은 경주국립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초석의 규모로 보아 당시에는 대단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약사전은 조선시대에 세워졌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화쟁국사비적, 삼룡변어정(8각 석정)이라는 우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분황사약사여래입상 등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켠에 단정하게 쌓여 있다.

분황사화쟁국사비부는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는데,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 분황사청보리밭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구황동)

분황사는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로 국보인 모전석탑으로 특히 유명하다. 현재 3층만 남은 분황사 모전석탑은 본래 9층 규모였다고 전하는데, 7세기 신라의 건축과 조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재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 같은 분황사 주변에는 매년 봄 싱그러운 청보리밭이 펼쳐진다. 추석 직후에 파종한 보리가 이듬해 봄부터 초여름까지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분황사 주차장에서 황룡사지 방향을 바라보면 황룡사 역사문화관을 배경으로 짙푸른 청보리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파란 하늘과 따스한 햇살, 봄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해 질 무렵에는 노을에 물든 청보리가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천년 경주의 매력을 더한다.

⊙ 황룡사역사문화관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임해로 64-19 (구황동)

황룡사 역사문화관은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자리 잡고 있다. 황룡사지 바로 옆에 건립된 전시관으로 황룡사지의 연구와 발굴조사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내부에는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 영상 시청각실, 발굴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 역사전시실 등으로 이루어져 졌다. 1층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도 전시되어 있다. 모형탑 전시실 옆에는 황룡사지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로비 카페가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관광 홈페이지

⊙ 경주 황룡사지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임해로 64-19 (구황동)

황룡사는 6세기 신라시대 때 만들어져 고려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찰로 지금은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터만 남아있다. 면적 8,800평 규모에 불국사의 8배나 되는 대형 사찰로 추정된다.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고, 금당은 584년(진평왕 6)에 완성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년) 탑의 건조까지 모두 완성된 황룡사는 신라의 호국 신앙의 중심지였다. 황룡사 경내에는 신라 보물 중 하나인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었으며 이는 당나라 유학 후 돌아온 승려 자장대사의 건의로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3년 만에 완성된 신라의 상징물이었다. 현재 구층 목탑이 서 있던 자리에는 탑을 지탱해 주었던 중앙 기둥 주춧돌인 심초석이 남아 있다. 이 절은 신라 왕궁 월성의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새로운 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새로운 궁 건립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거동도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다.
1969년 강당지를 발굴조사하여 금당, 강당, 탑지의 초석을 발굴했고, 1976년 3월부터 8년간의 발굴 작업에서 독특한 가람배치인 일탑 삼금당식으로 밝혀졌으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단을 비롯한 건물 하부구조는 확인되었으나, 상부가 정확히 고증되지 않아 전체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64개 주춧돌로 된 기단부만 복원하였다.
황룡사지 터 옆에는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 영상 시청각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 역사전시실 등으로 구성된 황룡사지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있으며 1층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이 전시되어 있다.

⊙ 경주 동궁과 월지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102 (인왕동)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푼 장소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雁)과 오리 압(鴨)을 써서 예전엔 안압지로 불렀으나, 1980년대 이곳에서 월지-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고,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지는 내용으로 보아 이곳이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린 장소로 확인되어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 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 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총 27동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현재는 3채만 복원되었다. 그 건물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과 월지에 반사된 모습은 경주의 대표 야경명소로 뽑힌다.

⊙ 신라왕경숲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883-44

신라시대 수도인 왕경지구의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해 경주 명활산성에서 분황사까지 5리, 즉 2km에 걸쳐 ‘오리수’라는 숲을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보문관광단지 입구에 자리한 신라 왕경 숲은 이 같은 신라시대 치수사업의 역사를 간직한 숲으로 재현됐다. 1,500년 전 서라벌의 왕들이 거닐던 숲으로 꾸며진 신라 왕경 숲은 지난 2007년 세계 문화엑스포 개최와 함께 일반에 공개됐다. 주요 관광지와도 가까워 시민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쉬어가기 좋다. 아직 울창한 숲은 아니지만 넓은 잔디밭과 푸른 가로수 덕분에 한가롭게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도 인기다. 신라 왕경 숲 근처에는 전통 한정식과 순두부 등 다양한 메뉴를 맛볼 수 있는 먹거리촌도 조성돼 있다.

⊙ 경주 탈해왕릉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산17

경주 동천동에 있는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57∼80)의 무덤으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무덤의 형식 자체는 일반적이나, 신라 초기의 왕릉이고 특히 최초의 석씨 왕릉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무덤은 높이 4.5m, 지름 14.3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봉토무덤이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왕릉 초입에는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전각 숭신전이 있다.
탈해왕은 신라 최초의 석씨 왕으로 62세에 즉위하여, 24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 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또는 완하국,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궤에 넣어 바다에 버리니 동해 아진포에 닿았다. 그때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 보고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다.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었다. 탈해왕은 석씨의 시조로서 신라 최초 석씨 왕이 되었다.

⊙ 경주문화관 1918


- 홈페이지
https://logingj.k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266 경주역

2022년 12월 문을 연 ‘경주문화관 1918’은 약 100여 년 동안 경주의 출입문이던 경주역이 새 철도 개통으로 문을 닫아 그 역사를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이다. 1918년 개통한 경주역의 역사를 간직하면서 문화를 향유하는 문화 플랫폼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로 공모를 통해 지어진 이름이다.
이 복합문화공간은 전시실과 지역 작가를 위한 창작스튜디오, 커뮤니티실, 야외 광장 공연 등으로 활용되며 문화예술에 관심있는 시민들이 다양한 창작 활동을 경험하고 교류하는 공간으로 운영된다.
문화관 앞 광장에선 공연이 열리고 4월~10월에는 예술가와 시민이 만나는 토요정기 플리마켓 ‘아트&마켓 1918’이 열리며 다양한 수공예품 판매와 체험놀이, 이벤트가 진행되며, 어린이를 위한 야외 놀이터가 있어 온 가족이 문화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장소이다.

⊙ 경주핑크뮬리(경주핑크뮬리군락지)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경주 핑크뮬리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한 첨성대 일원에서 구경할 수 있다.
매년 핑크뮬리가 군락을 이루는 9~11월경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방문한다. 포토존에 관련된 조형물이 없어도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다. 경주 IC에서 가깝고 주변에는 대릉원 경주시 사적공원, 국립경주박물관 등이 있다.

(사진 출처: 경주시 공식 블로그)

⊙ 경주 석빙고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449-1

석빙고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월성북쪽에 축조한 조선시대의 화강석제 얼음창고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사용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얼음은 왕실의 제사에 쓰이거나, 왕실과 고급 관리들의 음식이나 고기 등의 저장, 의료용 또는 식용으로 사용했다. 워낙 얼음이 귀했기 때문에 경국대전에 엄격히 규정할 만큼 얼음 배급은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이 석빙고는 입구가 월성 안쪽으로 나 있으며, 계단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성의 경사를 따라 안이 깊어지며, 내부는 길이 12.27m, 폭 5.76m, 높이 5.21m 규모로 모두 가공된 석재로 되어 있고, 천장에 1~2m의 간격의 4~5개의 홍예라 부르는 아치를 만들고 그 사이가 움푹 들어간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사이에 더운 공기가 갇히고 위쪽의 환기 구멍을 통해 빠져 나가게 된다. 빗물을 막기 위해 봉토를 조성할 때 진흙과 석회로 방수층을 만들었고, 얼음과 벽 및 천장 틈 사이에는 왕겨, 밀짚, 톱밥 등의 단열재를 채워 외부 열기를 차단했다. 빙고의 바닥은 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자연적으로 배수되도록 했다. 빙고 외부의 봉토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 복사열로 인한 열 손실을 막고, 외곽으로는 담장을 설치하여 외기를 차단했다. 그리고 2~3곳의 환기구를 만들어 외부 공기와 통할 수 있게 하였는데 봉토 바깥까지 구조물이 나오게 하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본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에서 '24년'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국문 관광정보 서비스'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https://kto.visitkorea.or.kr/kor.kto'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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