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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상북도 경주시] 물방아삼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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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아삼계탕


- 물방아삼계탕
054-746-3311,054-749-9944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알천북로 339-1

물방아 삼계탕은 경주 동천동에 있는 삼계탕 전문점으로, 삼계탕 단일 메뉴만을 판매하고 있다.
냉동닭을 쓰지 않고 판매할 만큼의 닭을 구입하여 그날 그날 소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한다.
단체석도 완비되어 있어 각종 모임을 하기에도 좋다.


※ 소개 정보
- 대표메뉴
삼계탕

- 문의및안내
054-749-9944

- 쉬는날
명절연휴

- 신용카드가능정보
가능

- 어린이놀이방여부
0

- 영업시간
10:00~20:30 (라스트오더 20:00)

- 예약안내
전화 예약 가능 (054-746-3311,054-749-9944 )

- 좌석수
100석

- 주차시설
주차 가능(30대)

- 취급메뉴
삼계탕

- 포장가능
가능(일부 메뉴)





◎ 화장실
남녀개별 / 업소 내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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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위 관광 정보

⊙ 분황사


- 홈페이지
http://www.bunhwangsa.org
경주문화관광 https://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芬皇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분황사는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으면서 국보로 지정된 모전석탑으로도 유명하다.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 간 사찰로 명성이 높다. 선덕여왕 3년(634년)에 지어진 절로서,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를 쓴 곳이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경덕왕 14년(755년)에 불상주조의 대가인 강고 내말이 만든 약사여래상이 있었다. 선덕여왕의 권유로 자장법사도 오래 머물렀으며, 원효의 아들인 설총은 원효대사가 돌아가신 후 아버님의 소상을 만들어 모셨고 이 소상은 고려후기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효가 이곳에서 해동종을 완성했다고 하여 해동종을 분황종이라고도 한다. 이 절은 평지 일탑 일금당의 가람배치로서 다른 사찰에서 보듯 중문, 탑,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나 절터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치는 않다. 통일신라 이전에 세운 모전탑으로 원형은 5층인지 7층인지 9층인지 알 수 없으나 그중에서 지금은 3층(국보)만 남아있다. 신라탑은 전탑양식이 유행하여 백제의 미륵사지 목탑구조 모방 전탑과 결합하여 통일신라 석탑의 정형을 이루었다. 통일신라의 모전탑 및 전탑은 안동, 의성, 제천 등지에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어갔다고 한다.

이 탑은 바다속의 안산암을 갈아서 쌓은 것으로 1915년 탑을 수리하다가 사리장치가 든 돌 상자 속에서는 구슬과 금은으로 된바늘, 고려시대 화폐가 발견됨으로써 고려시대에도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바늘은 탑을 건립한 선덕여왕과 관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에는 1층 탑신 4면에 감실을 만들고 돌문을 달았으며 이 입구마다 좌우로 수문장인 금강역사상이 있고, 탑에는 돌사자가 놓여 있다. 금강역사상은 조각이 아름답고 입체감이 두드러져 삼국시대 조각 기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분황사 사찰 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오르거나 흘러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분황사 경내, 당시의 우물 석정에는 아직도 물이 마르지 않고 있는데 이 우물 속에 호국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1965년 우물 속에서 14구의 목이 부러진 석불들이 출토되었고이 석불들은 경주국립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초석의 규모로 보아 당시에는 대단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약사전은 조선시대에 세워졌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화쟁국사비적, 삼룡변어정(8각 석정)이라는 우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분황사약사여래입상 등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켠에 단정하게 쌓여 있다.

분황사화쟁국사비부는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는데,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 분황사청보리밭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구황동)

분황사는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로 국보인 모전석탑으로 특히 유명하다. 현재 3층만 남은 분황사 모전석탑은 본래 9층 규모였다고 전하는데, 7세기 신라의 건축과 조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재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 같은 분황사 주변에는 매년 봄 싱그러운 청보리밭이 펼쳐진다. 추석 직후에 파종한 보리가 이듬해 봄부터 초여름까지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분황사 주차장에서 황룡사지 방향을 바라보면 황룡사 역사문화관을 배경으로 짙푸른 청보리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파란 하늘과 따스한 햇살, 봄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해 질 무렵에는 노을에 물든 청보리가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천년 경주의 매력을 더한다.

⊙ 신라왕경숲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883-44

신라시대 수도인 왕경지구의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해 경주 명활산성에서 분황사까지 5리, 즉 2km에 걸쳐 ‘오리수’라는 숲을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보문관광단지 입구에 자리한 신라 왕경 숲은 이 같은 신라시대 치수사업의 역사를 간직한 숲으로 재현됐다. 1,500년 전 서라벌의 왕들이 거닐던 숲으로 꾸며진 신라 왕경 숲은 지난 2007년 세계 문화엑스포 개최와 함께 일반에 공개됐다. 주요 관광지와도 가까워 시민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쉬어가기 좋다. 아직 울창한 숲은 아니지만 넓은 잔디밭과 푸른 가로수 덕분에 한가롭게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도 인기다. 신라 왕경 숲 근처에는 전통 한정식과 순두부 등 다양한 메뉴를 맛볼 수 있는 먹거리촌도 조성돼 있다

⊙ 황룡사역사문화관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임해로 64-19 (구황동)

황룡사 역사문화관은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자리 잡고 있다. 황룡사지 바로 옆에 건립된 전시관으로 황룡사지의 연구와 발굴조사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내부에는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 영상 시청각실, 발굴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 역사전시실 등으로 이루어져 졌다. 1층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도 전시되어 있다. 모형탑 전시실 옆에는 황룡사지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로비 카페가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관광 홈페이지

⊙ 경주 황룡사지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임해로 64-19 (구황동)

황룡사터는 경주시 구항동 분황사 앞뜰에 널리 펼쳐져 있다. 신라 최대의 절이자 호국의 대사찰로서 고신라 불교문화의 정수가 모두 모여 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창건역사를 보면 신라 진흥왕 14년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대궐을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다 하여 이를 절로 고쳐 황룡사라고 하고 17년 만인 569년 완성했다. 이 때 솔거가 이 절의 벽에 노송을 그렸다.명실 공히 신라 제일의 국찰이었다. 584년에는 금당을 지었다. 그 뒤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율사가 태화지 옆을 지날 때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여 구한이 와서 조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다. 또 탑을 세운 뒤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 했다.
자장은 귀국해 선덕여왕께 청하여, 구층탑을 짓게 되었다.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으며, 자장은 부처사리 100과를 탑 속에 봉안해 645년에 탑을 완성했다. 석탑을 건립하는 중에 백제건축가 아비지가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백제가 망하는 현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멈추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날이 어두워지더니 늙은 스님과 힘센 장사가 장육존상이 안치된 금당에서 나와 탑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아비지는 이에 감동하여 자기를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삼국유사)
선덕여왕이 이 탑을 세운지 23년 만에 신라는 3국을 통일하였고 후에 수많은 현철들이 신라 삼국통일은 이 탑의 영험이라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3보배라 하는 황룡사 장육존상, 황룡사 구층탑 및 진평왕 옥대 중 2개가 황룡사에 있었으며 신라 최대의 종이 황룡사에 있었는 데 몽고의 침입으로 없어졌다. 황룡사에서는 자장, 원효 등 신라 최고의 고승들이 설법하고 진흥, 진평, 선덕, 헌강, 진성의 제왕이 친히 설법을 듣던 곳이다. 1969년 7월 이곳 강당지를 발굴조사하여 금당, 강당, 탑지의 초석을 발굴했고, 1976년 3월부터 8년간의 발굴 작업에서 독특한 가람배치인 일탑 삼금당식으로 밝혀졌으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단을 비롯한 건물 하부구조는 확인되었으나 상부가구재의 정확히 고증되지 않아 전체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단부만 복원하였다. 발굴된 터에서 나타난 사찰의 면적은 8,800평해 달해 불국사의 8배나 된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경주 탈해왕릉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산업로 4152-10 (동천동) 부근

경주시가에서 서남방 표암 근처에 있는 원형토분이다. 신라 4대 탈해왕 재위중 가야와 황산진구에서 싸웠으며 석씨왕의 최초왕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릉은 원래 성북쪽 양정구 혹은 소정구에 장사하였다고 하나 다만 성북이라고 한 점만 현위치와 근사하다. 원형봉토분으로서 릉의 형식 자체에는 특이한 점이 없는 일반적인 형식으로 높이 7m, 직경10m 이며 주위면적은 37,926㎡(11,493평)이다.

* 연혁(유래)

이 능은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57∼80)을 모신 곳이다.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 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완하국,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궤에 넣어 바다에 버리니 동해 아진포에 닿았다. 그때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 보고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다.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았다. 석씨는 62세 때 왕위에 올랐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삼국사기에는 "성북의 양정 언덕에 장사하였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수장하였다가 뼈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동악(東岳)에 모셨는데 지금의 동악 대신(大神)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성북이라고 한 점이 현재의 위치와 부합된다. 이 무덤은 높이 4.5m, 지름 14.3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봉토무덤이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 경주 헌덕왕릉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알천북로 473-17 (동천동) 부근

형식은 원형의 토분(土墳)으로, 밑에 경덕왕릉식의 호석(護石)이 돌려 있다. 즉, 봉토 밑에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판석(板石)을 돌려 호석을 삼았고, 판석과 판석 사이에 탱석(撑石)을 세웠으며,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었다. 또, 탱석 표면에는 방향을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었고, 호석에서 일정한 거리에 박석을 깔았으며, 그 밖으로 난간을 돌렸다. 난간 기둥에는 상 ·하에 구멍이 있어 기둥과 기둥 사이에 2개씩의 관석(貫石)을 끼웠는데, 이는 다른 왕릉과 같은 형식이다. 헌덕왕은 18년간 재위하였는데, 이 시대에 이미 통일신라의 국력이 쇠약해져 재위기간 중에 2차례의 반란이 일어났고, 치적 또한 두드러지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도 신라의 왕릉으로서는 호화롭게 축조된 것은 이례적이다. 기록에는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천림사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능 남쪽에 있는 절터로 추측된다.

지정면적 1만8000㎡, 무덤지름 26m, 높이 6m.


⊙ 경주 동궁과 월지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102 (인왕동)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이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 묵객들이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며, 이곳을 기러기 ‘안’자와 오리 ‘압’자를 써서 ‘안압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1980년대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이 곳이 본래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 되어 ‘안압지’라는 이름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 경주 낭산 일원


- 홈페이지
경주 문화관광 http://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마을길

경주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었다. 산허리는 잘록하며 높이는 108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옛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리며 신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신라 실성왕 12년(413)에는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다. 나라에서는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로는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명인 백결 선생이 살았으며, 문창후, 최치원이 공부하던 독서당도 있다.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호국 사찰로 알려진 신라 향가의 현장 사천왕사터가 있다. 동북쪽에는 황복사터와 삼층석탑이 있으며, 서쪽 중턱에는 낭산 마애삼존불이 있고, 그 주변에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등이 남아있다.

⊙ 경주문화관 1918


- 홈페이지
https://home-ticket.co.kr/yeosuziptrek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266 경주역

2022년 12월 문을 연 ‘경주문화관 1918’은 약 100여 년 동안 경주의 출입문이던 경주역이 새 철도 개통으로 문을 닫아 그 역사를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이다. 1918년 개통한 경주역의 역사를 간직하면서 문화를 향유하는 문화 플랫폼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로 공모를 통해 지어진 이름이다.
이 복합문화공간은 전시실과 지역 작가를 위한 창작스튜디오, 커뮤니티실, 야외 광장 공연 등으로 활용되며 문화예술에 관심있는 시민들이 다양한 창작 활동을 경험하고 교류하는 공간으로 운영된다.
문화관 앞 광장에선 공연이 열리고 4월~10월에는 예술가와 시민이 만나는 토요정기 플리마켓 ‘아트&마켓 1918’이 열리며 다양한 수공예품 판매와 체험놀이, 이벤트가 진행되며, 어린이를 위한 야외 놀이터가 있어 온 가족이 문화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장소이다.



본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에서 '23년'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국문 관광정보 서비스'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https://kto.visitkorea.or.kr/kor.kto'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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